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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테레사

Story 2007. 8. 24. 19:22


테레사


우리 동시대의 인물 가운데 1997년 9월 5일(한국시간 6일) 세상을 떠난 마더 테레사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정신적으로' 큰 영향을 준 사람도 드물 것이다.

허물어진 나병환자의 손에 입맞추며 악취나는 그들의 몸을씻어 주고 죽어가는 에이즈환자를 끌어 안아주는.... 끊임없이 자기를 내어주는 자기희생, 그칠줄 몰랐던 마더 테레사의 그 사랑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살아있는 성인'이라는 말을 들었던 마더테레사의 생애를 소개 한다.


1. 부르심속의 부르심


마더 테레사는 19l0년 8월27일에 유고슬라비아의 한 평범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태어날 때의 이름은「아그네스 곤히아 브락스히야」(Agnes Gonxha Bejaxhiu)였다. 그녀의 가계는 알바나아에서 유고슬라비아로 이주해 온 농민집안이었는데 생활은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 국립국민학교에 재학하는 동안 그녀의 가슴속에는 신앙심이 무럭무럭 움텄다. 열 두살 때엔 어떤 신심회에 가입했는데, 학교는 비 가톨릭계였지만 이 신심회를 지도하는 신부가 있어서 많은 감화를 받았던 것 같다.

그후 유고의 예수회에서는 인도선교를 위해 제1진을 1925년에 캘커타에 파견한 바 있었다. 그 중 한 회원이 벵갈에서 네팔인을 상대로 펼친 선교활동을 감동적으로 적은 편지를 자주 모국으로 보내주었으므로 그것이 신심회 회보에 실리기도 했다.


이 글을 통해서 어린 소녀는 장래에 종교적이고 교육적인 사회사업에 매진하는 사도직을 꿈꾸게 되었다.

성장해 가면서 자기도 어떻게 인도로 건너가 볼 수 없을까 하고 수소문하던 차에, 마침 본부를 아일랜드의 더블린에 두고서 벵골에서 선교활동을 벌이고 있던 로레토 수녀회로부터 입회 권유가 왔다. 그녀는 이것을 첫 번째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여기고 이에 순응하여 수녀회에 가입, 영어를 익힌 다음 수녀가 되는 수련을 밟고자 인도로 건너갔다.

나이 만 19세가 된 1929년 1월, 히말리야 산록에 위치한 다르엘령의 수도원이 첫 수련장이어서 거기에 체류케 되었다. 이로부터 만 2년의 수련기간을 거친 끝에 수녀가 되기 위한 첫 서약인 「유기허원」 을 한 후 로레토 수도회에서 운영하던 캘커타 동부지역 엔탈리에 위치한 성 마리아 여고로 부임했다. 그곳에 재직하면서 6년 뒤인 1937년에 종신허원을 함으로써 신앙적으로 하느님과 영원히 결혼한 몸이 되었다.

36세 때이던 l943년은 그녀의 생애에서 하느님의 두 번째 부르심을 받은 특별한 해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그녀는 지난 17년간을 낮선 이국 땅, 그것도 이 지구상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의 빈한한 대도시 캘커다의 가톨릭계 학교에서 지리학을 가르치며 수녀의 삶을 살아왔다. 이 동안에 학교장으로 봉직했는가 하면 학교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던 인도 방인수녀회인 성안나 수녀회의 수련장을 맡기도 했다.

이따금씩 그녀는 캘커다 시 어느 곳에나 산재한 빈민촌을 두루 돌아볼 기회를 가졌었다. 그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여서 먹을 것도 잠잘 곳도 없는 노인이나 병약자들이 밤사이에 층계나 남의 접 처마 밀에서 시체로 발견되는 게 예사였다. 상처 입은 여인은 환부에 구더기가 득실거린 채 숨을 헐떡이며 노변에 누워 있고, 서구화의 물결을 타고 성이 문란해진 청소년 계층의 무분별한 동거생활로 신생아들이 골목골목의 쓰레기통에서 수거되기가 일쑤였다. 이런 참상을 애타게 생각하던 그해 9월 「테레사」수녀는 피정을 받으러 다르엘링으로 가던 기찻간에서 문득 하느님의 계시를 들었다. 테레사 수녀는 이것을 '부르심 속의 부르심'이라고 말했다.


"부르심이 뜻하는 것은 아주 단순했습니다. 내가 로레토 수녀원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하느님을 따라 가난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 속에 들어가 하느님을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뜻에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명령이었습니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았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몰랐습니다. 나의 소명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데는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다만 주어지는 일이 달라졌을 뿐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봉사한다는 것'이 달라졌을 뿐입니다."


TERESA
가난한 사람들 속으로


테레사는 종신허원을 한 수녀였으므로 수도회를 탈퇴하기 위해선 교회법상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만 했다. 수도회 소속의 수녀가 바깥세계로 뛰어들어 봉사하는 재속수녀가 되려면 먼저 소속회 원장의 동의를 구해야하고, 소속 교구인 캘커타 대주교에게 청원을 거쳐 최종적으로 바티칸교황청의 허락을 얻어야만 한다. 그녀는 이 모든 과정을 거쳐 로레토 수도회 수도복을 벗고 빈민과 기아, 나환자들을 위해 봉사하는「사랑의 선교회」창설을 목적으로 흘로 거리를 향해 뛰쳐나왔다.

그녀는 앞날을 대비하여 3개월간 간호학을 배운 경험을 유일한 밑천으로 삼아 단신으로 1948년 12월 20일, 모티즈힐 빈민촌에 찾아갔다. 빈민가에 발을 들여놓은 첫날 테레사 수녀가 처음 만난 사람들은 어른들이었다. 그들은 이곳에 학교를 열고 싶다는 테레사 수녀의 계획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꼭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테레사 수녀에게는 칠판도 분필도 살 돈이 없었고, 학생들 또한 공부에 필요한 것을 아무 것도 갖고 있지 못했다. 테레사 수녀가 모티즈힐을 찾은 둘째 날엔 이미 5명의 어린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웅덩이 근처의 나무 아래서 자신이 세운 최초의 학교를 열었다. 테레사 수녀는 당시의 모습을 이렇게 말해주었다.


"주운 조그만 나뭇가지로 땅바닥에 글자를 썼습니다. 어린이들은 허리를 굽혀 땅바닥을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의 학교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12월 28일, 학생 수는 이미 28명에 이르렀다. 1949년 1월 4일, 이 날엔 기쁜 일이 더 많았다. 3명의 교사가 돕고 싶다는 소식을 전해왔고 학생들의 수도 56명으로 늘어났다.

테레사 수녀는 학교 외에 진료소를 열고 싶었다. 이미 병자들의 간호에 나서고 있었지만, 제대로 된 진료소를 열고 싶었다. 캘커타에는 결핵과 나병, 그리고 온갖 질병이 만연해 있었다. 가는 곳마다 도와 달라고 부르짖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테레사 수녀는 병에 걸린 사람들을 병원에 데려다 주어 진료를 받게 했다. 그러나 환자가 너무 많아 모든 환자들에게 의사의 진료를 받게 할 수는 없었다. 약을 주는 것만으로 치료할 수 있는 환자도 많았으나 필요한 약을 나누어주는 곳은 없었다.


테레사 수녀는 마침내 진료소를 열고 치료도 해주고 약도 나누어주었다. 예상대로 파트나의 수녀들이 의사와 도울 사람을 보내 주었고, 성 마리아 학교에서도 두 사람의 교사가 찾아와 돕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교사나 의사의 도움이 일시적으로 중단된 때도 있었다. 봉사에 나선 사람들이 가족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고 슬럼에서의 일에만 전념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은 하느님에게 봉사한다는 강한 신념이 없으면 계속될 수 없다는 것을 테레사 수녀는 점점 더 절실히 느꼈다


"이 일을 오래 계속하기 위해서는 등뒤에서 밀어줄 힘이 필요하다. 신앙생활만이 그러한 힘을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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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선교회의 탄생


'가난한 이들의 작은 자매회'가 운영하는 '성 요셉 노인의 집'에 임시 거처를 두고 모티즈힐과 틸잘라 빈민가에서 학교와 진료소를 열어 활동하고 있던 테레사 수녀는 자신이 살고 일할 독자적인 장소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던 참에 1949년 2월 28일 크리크 레인 14번지에 있는 고메스의 집 3층으로 이사가게 되었다.

크리크 레인으로 이사온 지 3주가 지난 후 테레사 수녀는 최초의 협력자를 만나게 되었다. 옛날의 제자로 스바시니 다스(Subashini Das)가 찾아온 것이었다. 테레사 수녀는 당시 학생들에게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봉사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수업이 없는 토요일 오후에는 실제로 봉사활동 그룹을 만들어 실천하게 했다. 이 가르침에 따라 학생들은 병원에 가서 환자들을 돌보기도 하고 빈민가에서 어린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치기도 했는데, 스바시니 다스는 그런 제자들 중의 하나였다. 홀로 외롭게 일하던 테레사 수녀는 자신과 함께 생활하면서 일할 첫 입회자이며 협력자를 맞게 되어 큰 위로와 힘을 얻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며칠 후 또 한 사람의 협력자가 찾아왔고 테레사 수녀와 뜻을 함께 하는 자매들의 수가 마침내 10명이 되었다. 거의 모두가 성 마리아 학교의 제자들이었다. 테레사 수녀와 그 자매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기 위해 식량과 음식을 구하러 다녔다.

1950년 초 페리에 대주교는 테레사 수녀가 이끄는 회의 활동을 승인하고 캘커타 대교구 산하의 새로운 수도회로 인가했다. 테레사 수녀와 그 자매들의 모임이 정식 수도회로 발족되기 위해서는 회헌이 필요했다. 테레사 수녀는 수도회의 이름을 '사랑의 선교회(Missionaries of Charity)로 정하고, 275조의 회헌을 마련하였다.


"우리들의 목적은 십자가 위에 계신 예수님의 한없는 갈증을, 사람들의 사랑의 갈증을 풀어드리는 데 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복음의 권고를 지키며, 회헌에 따라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마음을 다해 봉사한다. 우리는 물질적 정신적으로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취하신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 예수님에게 봉사하며 이들이 하느님 닮은 보습을 되찾도록 일한다.


창립이래 사랑의 선교회는 자신들의 목적을 잊지 않기 위해 이 말을 되새기고 있으며, 그래서 이 말은 선교회의 모원과 지원곳곳에 걸려 있다. 사랑의 선교회는 또한 일반 수도회들이 지키는 3가지 서원, 즉 '청빈'과 '정결'과 '순명'외에 하나의 서원을 더 했다. 그 4번째 서원은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마음을 다해 헌신한다"는 것이다.

 1950년 10월 7일 새로운 수도회 '사랑의 선교회'에 대한 로마 교황청의 인가가 내렸다. 테레사 수녀와 젊은 자매들은 더 없는 기쁨과 감격 속에서 이 소식을 들었다. '사랑의 선교회'의 회헌은 '총장'을 '마더(Mother)'라고 부르기로 했으므로 이날부터 '테레사 수녀'는 '마더 테레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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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 가는 사람들의 집(니르말 흐리다이)


 
1952년 문을 연 '죽어 가는 사람들의 집'은 '사랑의 선교회'가 벌인 최초의 큰 일이었다. 마이클 고메스는 이 새로운 일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어느 날 우리들의 집 가까이 있는 캠프벨 병원(Cammpbill Hospital) 근처의 길가에서 한 남자가 죽어가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병원에 부탁해 보았지만 환자를 받아들여 주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어 약방에 가서 약을 사 가지고 돌아와 보니 그는 죽어 있었습니다. 개나 고양이도 이처럼 비참하게 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보다도 자기의 애완동물을 더 소중하게 여긴다'고 마더 테레사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면서 말했습니다. 마더 테레사는 경찰 당국자를 찾아가 이런 비참한 실정을 호소했고, 그것이 결국은 '죽어 가는 사람들의 집'이 되었습니다."


인도가 분할된 후 캘커타에는 난민이 넘쳐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누구로부터도 버림받아 비참하게 죽어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보면서 마더 테레사는 결심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사람을 더러운 도랑 속에서 저렇게 비참하게 죽게 해서는 안된다"고. 그래서 마더 테레사는 모티즈힐에 방을 빌려서 죽어 가는 사람들이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하도록 보살펴 주기로 했다. 이 집을 '니르말 흐리다이'(Nirmal Hriday), 즉 성모의 '순결한 마음의 장소'(Place of Pure Heart)로 이름지었다. 그래서 이 집은 '죽어 가는 사람들의 집'이라고도 했고, '칼리가트'라고도 했으며 '니르말 흐리다이'라고도 불리었다. '죽어 가는 사람들의 집'이 열린 초기에는 수녀들이 온갖 정성을 다 쏟아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어갔다. 그러나 1955∼56년쯤 되어서는 가까스로 반 수 정도가 살아 남았고, 그 후에는 살아서 나가는 사람들의 수가 죽는 사람들을 넘어서게 되었다. 누더기처럼 되어 악취가 나는 몸을 씻어 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더 테레사는 사랑의 선교회 자매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미사를 드리는 동안에 신부님께서 얼마나 깊은 사랑으로 얼마나 조심스럽게 그리스도의 몸(성체)을 만지는가를 보셨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꼭 그와 같이 하십시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런 비참한 모습을 하고 그곳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약 10만 명이 이곳을 지나갔다. 이곳에서 따뜻한 간호와 치료를 받고 살아나기도 했고 또는 죽어가기도 했다. 그들은 이곳에서 자신이 한 인간으로 인정받고 대접받고 있으며, 사람으로 중요하게 취급받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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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하우스


'사랑의 선교회'에 참가하는 자매들이 늘어남에 따라 크리크 레인에 있는 3층의 방들은 매우 비좁아졌다. 마더 테레사는 옥상에까지도 방을 만들었지만 더 넓은 공간이 필요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남자가 선교회로 찾아와서 팔려고 내놓은 적당한 건물이 있다고 알려 주었다. 그는 마더 테레사를 로우어 서큘라 로드 54a 번지에 있는 그 집으로 안내하여 주인을 만나게 해 주었다. 집주인은 "이 집은 신이 나에게 주신 것인데 나는 그것을 다시 신에게 돌려드린다"고 말했다.

사랑의 선교회는 이 집에 마더 하우스(Mather House, 모원(母院))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집은 그 이후 선교회의 활동 중심이 되어 자매들과 고락을 함께 해왔으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집이 되었다. 그러나 이 곳으로 이사온 1953년 당시만 해도 이 건물이 40년 뒤 인도와 세계 1백 20여 개국 이상에서 성스러운 활동을 벌이는 세계적인 조직의 중심이 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사랑의 선교회의 수녀들은 가난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가난하고 검소하게 사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왔다. 3벌의 사리와 튼튼한 신발, 그리고 조그만 십자가, 묵주, 금속으로 만든 얇은 접시, 이런 것들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의 전부였다. 험한 일을 하기 때문에 사리는 거의 언제나 해져 있었다. 마더 테레사의 사리가 대표적인 예인데, 사람들은 찢어진 곳을 수선한 자국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마더 테레사는 일을 하는데 가난은 필수적인 조건이라며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가난한 사람들처럼 살지 않으면서 어떻게 그들을 참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음식에 대해 불평한다면 우리도 같은 것을 먹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줄 수 있는 것은 적습니다. 고통 없이 일한다면 우리 활동은 사회사업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마더 테레사는 같은 정신에서 세탁기를 기증하고 싶다는 호의도, 정전에 대비해 발전기를 기증하고 싶다는 제안도 모두 거절했다. 전화만은 여러 사람의 설득으로 그 필요성을 인정하여 한 대만을 쓰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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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묻지 않은 어린이들의 집(시슈 브하반)


'죽어 가는 사람들의 집'을 연 이후 마더 테레사는 의지할 곳 없는 어린이들을 위한 '집'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의지할 곳 없는 아이들, 집 없이 떠도는 어린이들, 길가에, 도랑에, 쓰레기 더미에 버려진 아이들, 회복하기 어려운 병에 걸려 누구도 돌볼 수 없게된 아이들, 정박아, 장애아들...... 마더 테레사는 이들이 아무도 돌보아 주지 않는 가운데 비참하게 죽어 가는 것을 자주 보아왔다. 그래서 1955년 사랑의 선교회 본부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니르말라 시슈 브하반'(Nirmala Shishu Bhavan, '때묻지 않은 어린이들의 집'이란 뜻)을 열었다. '죽어 가는 사람들의 집'(니르말 흐리다이)을 연 지 3년 만이었다.

선교회는 캘커타에 '집'을 처음 연 이래 인도의 주요 지역에 '어린이들의 집'을 늘려 갔다. 이 집들은 미숙아나 병든 아이들을 주의 깊게 돌보고 간호해야 하므로 되도록 수도회 건물 가까이 두게 했다. 어린아이들의 수는 집의 크기에 따라 다른데, 가장 적은 곳은 20여 명, 많은 곳은 2백 명에 이르렀다.

마더 테레사는 단 한 시간밖에 살지 못하더라도 어떤 아이든 이 곳으로 데려와 달라고 부탁했다. 곧 죽어버릴 어린 아이를 위해 그렇게 귀중한 시간과 비용을 쓰는 것이 과연 가치 있는 일인지 물어오는 사람도 있었다. 자매들의 노력을 더 유효한 곳에 활용하는 것이 좋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마더 테레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비록 몇 분 동안밖에 살지 못할 아이라 할지라도 아무도 돌보아 주지 않는 가운데 혼자 죽어가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작은아이라 할지라도 사랑을 느끼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죽어 가는 아이에게 사랑을 주어 그 사랑 속에서 최후를 맞게 해 주는 것은 당연합니다. 나는 언제나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원치 않는 아이가 있으면 언제든지 우리에게 데려와 달라고. 결코 아이가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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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마을, 샨티 나가르


마더 테레사가 나병환자들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은 1975년의 일이었다. 어느 날 5명의 나병환자들이 사랑의 선교회의 '마더 하우스'를 찾아온 것이 그 계기가 되었다. 숨겨왔던 병이 드러나 버리자 직장으로부터 쫓겨나고 가족으로부터도 거절당한 끝에 의지할 곳이 없어 찾아온 것이다. 이 사건은 마더 테레사에게 하나의 '상징'이었다. 나병환자는 누구보도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때마침 나병과 피부병의 권위자인 센(Senn) 박사가 마더 테레사를 돕겠다고 나섰다. 센 박사는 어느 큰 병원에서 정년 퇴임한 이름 높은 의사였는데, 마더 테레사를 찾아와 자신의 경험과 능력을 살려 마더 테레사를 돕고 싶다고 말했던 것이다.

1957년 9월 최초의 이동진료차가 활동을 시작했다. 이동진료차는 매주 날짜를 정하여 같은 장소를 같은 시간에 찾아가 치료해 주었고, 1주일에 1백 명 이상의 환자들을 진료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58년에는 순회진료소를 8군데로 늘렸다.

마더 테레사는 나환자와 그 가족들이 치료도 받고 함께 일하며 자활하는 더욱 큰 공동체를 꿈꾸고 있었다. 그리고 그 꿈은 기적처럼 이루어졌다. 캘커타로부터 320km 떨어진 곳에 만들어진 '샨티 나가르(Shanti Nagar, 평화의 마을)가 바로 그것이다. 샨티 나가르는 마더 테레사의 숭고한 정신을 살리기 위해 서벵갈 주정부가 1961년 약 14만 평방미터의 땅을 제공함으로써 본격 추진되었다.

1961년 주정부로부터 땅을 기증 받았을 때만 해도 이 곳은 정글과 다름없는 미개척의 땅이었다. 토지는 마련되었으나 돈은 없었다. 그런데 그 때 기적이 일어났다. 1964년 교황 바오로 6세가 국제 성체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봄베이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 때 미국의 인디애나 주에 있는 노트르담 대학교에서 최고급 승용차 중의 하나인 링컨 건티넨잘을 기증했다. 교황은 봄베이에 체류할 때 이 흰색 리무진을 사용했다. 마더 테레사의 어가는 사람들의 집'을 방문할 때에도 그는 이 리무진을 타고 왔다.

교황은 '사랑의 선교회'가 벌이고 있는 활동을 보고 싶은 감명을 받아 인도를 떠날 때 이 차를 마더 테레사에게 기증했다. 그러나 이 차는 마더 테레사에게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차를 최대한 비싸게 팔아(복권을 붙여 팔았다) 46만 루피(한화 약 1억 5백 80만원)를 마련할 수 있었고, 이 돈을 즉시 '샨티 나가르'(평화의 마을)의 치료센터를 짓는데 투입했다. 이 병원을 짓는 데는 독일의 어린이들까지 기부금을 보내 왔다. 2년에 걸쳐 주요 건물이 지어졌다.

사랑의 선교회 자매들은 나병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예방조치를 다해 왔다. 건강하여 면역력이 있고 또한 적절한 교육을 받으면 나병은 거의 감염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환자들을 돌보다가 나병에 걸릴 수도 있다는 것을,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며 감염될 수도 있다는 것을 모두 각오하고 있다. 나병환자들을 치료해 주려는 사랑의 선교회의 노력은 놀라운 결실을 거두었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가 완치되었기 때문이다. 나병은 오늘날에도 에이즈와 함께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고 혐오하는 질병이다. 그러나 마더 테레사는 그보다도 더 무서운 병이 있다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현대의 가장 큰 병은 나병이나 암, 폐결핵이라기보다는 자기를 필요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아무도 돌보아 주지 않는다는 생각, 그리고 자신이 버림받고 있다는 생각일 것입니다. 가장 큰 약은 사랑과 자비의 부족, 길거리에서 살고 있는 이웃에 대한 얼음같이 찬 무관심, 그리고 착취와 부패, 가난과 질병에 사람이 희생되도록 버려 두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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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렘 단 (사랑의 선물)


사랑의 선교회는 1975년 영국의 유명한 제약회사 ICI(Imperial Chemical Industries)로부터 건물을 하나 기증 받았다. 켈커타의 틸잘라에 있는 넒은 대지에 ICI가 중앙연구소로 지었던 근대적인 건물이었다. 마더 테레사는 이 집에 '프렘 단'(Prem Dan, 사랑의 선물)이란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육체적·정신적으로 건강상태가 좋지 않으나 회복될 가능성이 있는 병자들을 위한 장기 요양소를 열었다. 구내에는 병원 외에 재활센터와 작업장도 마련했다. 그리고 성인 장신병동과 뇌성 소아마비 어린이들을 위한 시설도 갖추었다. 가난하여 학교에 가지 못하는 어린이들을 위한 슬럼 스쿨도 이곳에 열었다.

마더 테레사는 거리에 버려지는 많은 코코넛 껍질을 이용해 작업장에서 섬유를 뽑아내어 매트나 로프를 만들었다. 이 제품을 '죽어 가는 사람들의 집'이나 '프렘 단'의 병원에 납품하고 시장에 내다 팔았다. 여기에서 얻는 수입은 가난한 사람들의 실업대책도 되고 자원회수운동도 되며 쓰레기도 줄여 주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가져 왔다.

`프렘 단'의 뜰 한 모퉁이에는 슬럼 스쿨을 열었다. 빈민가에서 어린이들을 모아 놓고 가르치는 일은 마더 테레사가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모티즈 힐에 학교를 연 이래 계속되었다. 어린이들의 가정은 몹시 가난했고 이곳에 오는 어린이들은 대개가 영양상태가 좋지 않아서 사랑의 선교회에서 우유와 함께 비스켓을 급식해 주었다. 이것을 먹기 위해 학교에 오는 어린이도 적지 않았다.

사랑의 선교회는 1981년 캘커타의 8곳에 슬럼 스쿨을 열어 약 1천 5백 명의 어린이들을 가르쳤다. 돈 없는 어린이들이 공부할 수 있는 곳이라고는 캘커타에서는 이곳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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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다 무료 진료소


캘커타의 실다 역 근처에는 병에 걸려도 병원에 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진찰하여 간단한 치료를 해 주고 약을 나누어주는 무료 진료소 및 시약(施藥)소를 열었다. 약을 타기 위해 아이를 안은 어머니들과 어린이들이 길게 늘어서 기다리곤 했다. 하루에 약 1천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이곳을 다녀갔다. 실다 역을 중심으로 한 주변 지역은 캘커타 시의 가난과 고통을 집약하고 있었다. 한 때 이역은 캘커타 시의 동쪽 현관으로 위용을 자랑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인도가 분할된 뒤로는 동 파키스탄(지금은 방글라데시)으로부터 끊임없이 난민이 몰려드는 관문이 되었고 역구내와 주변 지역은 슬럼화 되어 갔다. 역내의 매점이나 벤치, 음식점 등을 점령하는 것은 물론이고 승강장에까지 진출하여 여기에 조그만 집을 짓고 살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이곳에서 밥을 짓고 몸을 씻었으며 배설물을 버렸다. 구호단체들이 그들에게 식품과 옷을 나누어주고 살 곳을 주선해 주기도 했지만 사태를 개선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정부 기관의 적극적인 노력도 별 효과가 없었다.

마더 테레사의 무료 진료소는 이런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사람들은 진료소 앞에서 절박한 표정으로 치료를 기다리고 약을 구했다. 사랑의 선교회는 사람들에게 진료 카드를 주어 이 카드를 보고 어느 정도 그들의 상태를 지속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수녀들은 이들에게 치료약과 함께 비타민제와 영양제도 나누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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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소로부터 구출된 소녀들의 집 '샨티 단' 실다 무료 진료소



인도에는 '제일 걸'(jail girl)이란 말이 있다. 감옥에서 구출된 소녀라는 뜻이다. 사랑의 선교회는 감옥에서 데려온 소녀들을 수용하여 그들에게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훈련을 시키는 '샨티 단'(평화의 선물)도 열었다. 이 '집'은 캘커타에 있는 사랑의 선교회의 일곱 번째 '집'이다.

인도의 법률은 비행 소년 소년들을 사형에 처하거나 교도소에 수감하지 못하게 하고 그 대신 감찰원에 수용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많은 소년 범죄자들이 감옥이나 옛날 감옥이었던 곳에 수감되었다. 인도의 정부 기관은 비행 청소년뿐만 아니라 걸식하는 아이들, 돌보아 줄 부모가 없는 아이들, 매춘부나 알코올 중독자, 또는 폐인이 된 사람들의 아이들, 감염되지 않은 나환자의 자녀들도 다수 이런 곳에 수용했다. 그리고 이들은 이 곳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더 비뚤어지고 나빠졌다.

마더 테레사는 수도회에 기증된 한 건물에 감옥에서 구출해 낸 소녀들을 수용하여 이들에게 자활의 터전을 마련해 주었다. 그리하여 소녀들은 아름다운 뜰이 있는 집에서 자기 나이에 맞는 사리를 입고 재봉이나 자수를 배우면서 자활을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어두운 옛날의 상처가 치유되기 위해서는 그에 못지 않은 사랑이 필요한데, 이들 소녀들은 선교회의 수녀들이 베푸는 따뜻한 사랑 속에서 새로운 미래를 준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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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적인 연대 - 마더 테레사 협력자회


마더 테레사는 사랑의 선교회를 시작할 때부터 주변의 여러 사람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아왔다. 최초의 협력자는 아마도 크리크 레인 14번지의 자기집 방을 빌려준 고메스(Gomes)형제일 것이다. 이동 진료소, 나환자 치료센터 등에서 무료 진료 봉사를 해온 의사와 간호사들도 주요 협력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개인적으로 사랑의 선교회를 도운 사람들로서 조직적인 후원자들이라고 할 수는 없다. 조직적인 협력자들의 모임은 1950년대 캘커타에서 사회봉사활동을 해 온 앤 블라이키(Ann Blaikie)여사에 의해 시작되었다. 영국인 사업가의 부인인 블라이키 여사는 불우한 인도의 여성들을 위해 일하는 자원봉사자의 한 사람으로 바쁘게 살고 있었다. 1954년 6월 유난히도 더웠던 어느 여름 날 임실 7개월의 블라이키 여사는 힘든 일을 견디기 어려워 자원봉사활동을 일시 중단하고 자택의 베란다에 앉아 쉬면서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생각하고 있었다. 그 때 문득 예전에 읽었던 신문기사가 생각났다. 『스테이츠먼』(Statesman)지의 실린 마더 테레사의 봉사활동에 대한 기사였다. 그 봉사활동에 큰 감명을 받고 있었던 블라이키 여사는 마더 테레사를 만나 그를 위해 무엇인가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블라이키 여사에 의해 캘커타에서 조용히 시작된 마더 테레사를 돕는 모임은 영국에서 조그만 조직으로 뿌리를 내렸다. 하지만 사랑의 선교회가 여러 나라에 구호시설은 '집'을 열어감에 따라 이 모임은 국제적인 '마더 테레사 협력자회'로 조직화되어 갔다.

1969년 마더 테레사는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마더 테레사 협력자 국제협회'(International Association of the Co-workers of Mother Teresa)의 헌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해 3월 26일 이 조직의 수장(首長)으로서 헌장을 교황 바오로 6세에게 바쳤고, 교황은 여기에 축복해 주었다. 헌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마더 테레사 협력자 국제협회`는 전세계의 모든 종교, 모든 종파의 남녀, 젊은이, 그리고 어린이로 구성된다. 이들 구성원은 모든 계급에 속하는, 그리고 모든 신조를 가진, 가난한 사람 가운데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온 마음을 다해 봉사하면서 사람들 속에서 하느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또한 기도와 희생의 정신으로 마더 테레사 및 사랑의 선교회와 자신을 결합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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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눈에 비친 마더 테레사

- 세계에서 가장 상을 많이 받은 사람


마더 테레사가 하고 있는 일이 세상에 알려지자 이런 사람에게야말로 상을 주어야 한다는 움직임이 여러 곳에서 일어났다. 그래서 1962년부터 마더 테레사에게는 수많은 상이 잇따라 주어졌다.

마더 테레사가 하고 있는 일을 최초로 높이 평가한 나라는 인도였다. 마더 테레사가 활동을 시작한 지 14년째인 1962년 1월 26일 마더 테레사는 인도 공화국 기념일에 파드마 슈리 상의 수상자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인도 대통령으로부터 받았다. 인도 태생이 아닌 사람에게 이처럼 권위있는 상이 주어진 것은 처음이었다. 수상 소식을 들었을 때 마더 테레사는 이 상을 받아야만 하는가 고심했지만 캘커타 대주교와 상의 한 후 상을 받기로 하였다. 수상식 날 인도 대통령은 마더 테레사가 묵고 있는 뉴델리의 수도원으로 리무진 차를 보내 주었지만, 마더 테레사는 이것을 사양하고 사랑의 선교회에서 쓰고 있는 구급차 겸용의 밴을 타고 대통령 관저로 갔다.

그로부터 2-3달 후 마더 테레사는 필리핀의 막사이사이상을 받았다. 이 상은 필리핀의 막사이사이 전대통력을 기리기 위해 설립된 아시아 지역의 아주 권위있는 상이다. 이 상을 받을 당시 마더 테레사는 타지마할로 유명한 아그라에 나병환자들을 위한 시설을 마들기 위해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자금난 때문에 계획을 연기하지 않으면 안될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그래서 이러한 사실을 사랑의 선교회 자매들에게 알려 주기로 한 바로 그 날에 수상 소식을 날아들었다. 상금 5만 루피(한화 약 1천 1백 50만원)는 나병환자를 위한 시설 자금으로 씌었으니 하늘이 때를 맞추어 상을 준 것이라고들 했다.

1971년엔 많은 상을 받았는데, 그 가운데 권위있는 상은 교황 요한 23세 평화상을 당시의 교황 바오로 6세로부터 받은 것이었다. 상금 2만 1천 5백 달러(한화 약 1천 9백 70만원)는 샨티 나가르이 나병환자센터 건설자금으로 씌었다. 미국 보스턴에 있는 전국 가톨릭 발전회의가 주는 '착한 사마리아인 상'을 받은 것도 뜻깊은 것이었다.

1972년 11월엔 국제이해에 기여한 공로로 뉴델리에서 네루상을 받았고, 1973년 4월 25일에는 영구 필립 공이 마더 테레사에게 템플턴(Templeton)상을 수여했다. 이 상은 '종교의 진보 및 인간이 신(神)에 대한 지식을 더 많이 얻도록 장려하기 위해' 조지 템플턴 부부가 출연한 많은 재산을 기금으로 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이 상의 상패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씌어 있었다.


"귀하는 신(神)에 대한 인간의 지식과 사랑을 확대하고 심화시키는 도구가 되어 왔습니다. 그리하여 귀하는 신을 반영해 주는 인간의 삶의 질을 더욱 높이는 데 공헌했습니다."


이 외에도 1975년 그는 '생명을 경외한' 공로로 '알버트 슈바이처 국제상'의 첫 수상자가 되었고, 1976년엔 미국 아이오와 주의 오키프 주교로부터 '지상의 평화상'과 '가톨릭 이인종(i¶iNðuEa) 협의회상'을 받았는데, 이 상은 마틴 루터킹 목사가 받은 상이기도 했다.

 1979년 노르웨이 노벨상 위원회는 유엔 아동의 해를 맞아 노벨 평화상을 마더 테레사에게 주기로 결정했다. 노벨 평화상이 마더 테레사에게 주어진 것은 정치만이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사건이기도 했다.

세계의 많은 사람들은 마더 테레사가 노벨 평화상을 받기까지 그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다. 그러나 수상자로 이름이 알려진 뒤로는 세계 여러 나라의 보도기자들이 마더 테레사를 추적하여 취재하느라 야단법석이었다. 마더 테레사는 상을 받기 위해 오슬로에 머물었던 4일 동안을 생각하면 "취재 소동 때문에 나는 그만 하늘 나라고 가고 싶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언제나 그랬지만 마더 테레사는 수상 파티를 열지 말아달라고 부탁했고, 노벨상 위원회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노르웨이와 스웨덴은 물론이고 유럽 여러 나라에서 기부금을 내고 싶다는 신청이 잇따라 들어왔다. 어린이들까지도 용돈을 아껴 보내왔다. 그렇게 해서 모아진 기부금은 약 3만 6천 파운드(한화 약 5천 1백 60만원)였고, 여기에 연회를 열지 않고 절약한 비용 3천 파운드(약 4백 70만원)를 합쳐 3만 9천 파운드가 사랑의 선교회에 전달되었다. 그것은 노벨상의 상금 19만 2천 달러(약 1억 7천 5백 만원)의 3분의 1이 넘는 액수였다.

캘커타 도시는 기쁨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이러한 외부의 열광과는 대조적으로 마더 테레사는 조용히 수도원 안에 칩거하여 한 달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마더 테레사는 자신의 노벨상 수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노벨 평화상을 받은 것은 가난한 사람들 때문이었습니다. 그 상은 생각보다 훨씬 먼 곳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것은 전세계 구석구석에 살고 잇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람들의 양심을 움직였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의 형제 자매라는 것, 우리는 그들을 사랑으로 대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마더 테레사는 이처럼 이 지상에서 가장 영예롭고 권위 있다는 상과 학위를 받았다. 이러한 상들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마더 테레사와 그 자매들이 하는 일을 세상의 빛 속에 드러나게 하여 인류로 하여금 순수하고 고결한 한 '인간 거울' 앞에 자신을 비춰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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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사랑의 선교회



마더 테레사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헌신하기로 결단하고 로레토 수녀원을 떠난 것이 1948년, 그로부터 약 반세기가 지난 현재 사랑의 선교회는 놀랍게 발전했다. 마더 테레사 자신도, 그리고 초기에 마더 테레사를 도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도 오늘과 같은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현재 사랑의 선교회는 전세계 123개국에 구호시설인 566개의 '집'을 운영하고 있으며, 이곳에서 4천 3백 여명의 수녀들이 구호·봉사활동을 하면서 수도생활을 하고 있고, 그밖에도 사랑의 선교회에서 자원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나 선교회를 여러 방법으로 돕고 있는 국제 협력자 조직의 회원까지 포함시킨다면 그 숫자는 엄청날 것이다.

하고 있는 일도 다양하게 확장되었다. 주일학교를 비롯하여 입원환자방문, 가정방문, 죄수 방문 등을 일상적으로 하고 있으며 의료활동으로는 무료진료소의 운영, 나환자병원과 나환자들을 위한 재활 및 사회복귀 센터의 운영, 버려진 아이들, 장애아들을 위한 보육 및 보호시설, 의지 할 곳 없는 환자를 돌보는 진료시설과 죽음을 앞에 둔 사람들을 돌보는 '죽어 가는 사람들의 집'의 운영, 결핵환자와 영양실조에 걸린 사람들을 치료해 주는 치료 및 요양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이러한 사랑의 선교회의 활동 중에서도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나병퇴치운동에서 거두고 있는 성과이다. 인도의 나환자 공동체인 샨티 나가르의 치료센터가 1990년 한 해에 활동한 결과를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1만 7천 6백 13명의 나병환자가 치료를 받았고, 966명의 나병환자가 입원했으며, 499명이 수술을 받았다. 재활센터에서 785족의 특제 구두를 만들어 냈으며, 35명의 환자가 의족을 맞추어 달았다. 나환자 가족 가운데 135명의 어린이가 '때묻지 않은 어린이들의 집'(시슈 브하반)에 수용되었다. 2천 명이 매달 식료품 배급을 받았고, 4백 명이 매일 식사를 제공받았다.


사랑의 선교회는 1970년 이후부터는 알코올 중독자와 마약 중독자들을 치료하고 사회에 복귀시키는 치료센터를 여러 곳에 열었다. 특히 1980년대에 들어서는 현대의 나병이라고 불리우는 에이즈환자들을 위해 활동을 시작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에이즈를 두려워한 나머지 그들과의 접촉을 피하고 있다. 사랑의 선교회는 1985년 뉴욕에서 에이즈 환자들을 위한 첫 번째 '집'을 연 이래 미국의 워싱턴 DC, 댈러스, 불티모어, 샌프란시스코, 애틀란타 등지에도 에이즈 환자들을 위한 '집'을 열었다. 스페인, 포르투갈, 브라질, 온두라스에도, 그리고 아프리카에서도 에이즈 환자들을 위한 집을 열었다

스페인·포르투갈·브라질·온두라스에도, 그리고 아프리카에서도 에이즈 환자들을 위한 집을 열었다.

에이즈 환자의 대부분은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그들은 거절당한 사람들이고 아무도 곁에 있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많은 한을 품고 있다. 이런 비참하고도 절망적인 상태에서 죽음과 맞선다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사랑의 선교회는 그들에게 가정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 주려고 노력하며 그들과 함께 먹고 함께 이야기하며 함께 기도하고 함께 논다. 마더 테레사는 에이즈 환자들이 '선교회'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어떻게 죽음을 맞고 있는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어쨌든 놀랍게도 우리가 돌보는 곳에서 절망한 채 죽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그들도 평화롭게 하느님과 함께 있습니다. 전엔 달랐어요. 에이즈에 걸리 줄 알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많았지요. 하지만 우리가 돌봐 주고 난 뒤부터는 자살한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도 아름답게 죽습니다."


사랑의 선교회는 그때 그때의 필요에 응하여 일을 시작한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그러한 필요를 만나면 그만큼 활동분야도 더 넓어질 것이다. 마더 테레사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가난한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달에까지라도 찾아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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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애도



마더 테레사는 1997년 9월 5일 9시 30분(한국시간은 6일 오전 1시 30분) 사랑의 선교회 본부인 마더 하우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7세였다. 저녁식사와 기도를 마친 마더 테레사는 등이 아프다고 했다. 그리고 달려온 의사에게 "숨을 쉴 수 없다"고 말했다. 돌보던 수녀가 침대에 누이자 얼마 후 숨을 거두었다고 임종을 지켜본 한 수녀는 말했다. 그리고 "예수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예수님,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고 한다.

마더 테레사가 숨을 거두자 수녀들은 종을 울려 별세의 소식을 알렸다. 소식은 빠르게 전해졌고 곧 수많은 사람들이 빗속을 달려와 선교회 앞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 숫자는 곧 약 4천 명이나 되었다. 그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마더 테레사가 돌보았던 거리의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여러 사람들이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흐느껴 울었다. 손을 모아 기도 드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마더 테레사의 시신은 평소대로 사리를 입은 채 얼음 침대 위에 눕혀졌다. 그리고 선교회의 수녀들은 인도의 전통적인 의식에 따라 누워 있는 마더 테레사의 발에 입맞추거나 발을 어루만지며 한 사람씩 고인에게 경의를 표했다.

마더 테레사는 1983년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다. 이 해에 로마에 있는 사랑의 선교회의 '집'에 머무르고 있을 때 밤중에 침대에서 내려오다가 넘어지면서 숨겨진 병이 있다는 발견하게 되었다. 옆 가슴에 심한 통증을 느껴서 늑골이 부려졌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진찰한 의사는 뼈는 부러지지 않고 심장병이 발견되었다고 알려 주었다. 다쳐서 병원에 입원하게 된 것이 다행이라면서 병을 늦게 발견했더라면 심한 심장발작을 일으켰을 지도 모른다고 의사는 말했다. 마더 테레사는 73세가 되도록 이렇게 중한 병을 알아본 적이 없었다. 마더 테레사의 이 최초의 입원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걱정스럽게 지켜보았다. 그리고 로마의 살바도르 문디 병원으로 많은 편지와 전보를 보내왔다. 인도 대통령을 비롯해 미국 대통령, 그리고 친구인 조디 바스 서벵갈 주지사가 전보를 보내왔고 벨기에 국왕 부부는 문병하기 위해 로마를 방문하기까지 했다.

이후에도 마더 테레사는 1989년 12월에 현기증으로 넘어졌고, 1992년 심장병으로 쓰러진 후 회복된 바 있으나 그후 다시 건강이 악화되어 1996년 말에는 2분 동안이나 심장박동이 멎기도 했다. 마더 테레사는 그 후 폐렴과 말라리아 합병증세까지 겹쳐 97년 초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직책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때문에 후임총장을 선출하기 위한 대의원 회의가 소집되어 97년 3월 13일 마리아 니르말라 수녀(1934년 생, 1999년 현재 65세)를 새 총장으로 선출했다.

마더 테레사의 서거 소식이 알려지자 인도의 국영 텔레비젼 방송은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성가와 조곡을 방송했으며 인도정부는 별세한 9월 5일과 장례일인 9월 13일 공식 추도일로 선포하고 조기를 게양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6일(현지시간) 긴급 각의를 열고 장례식을 국장으로 하기로 결정했다. 사랑의 선교회는 원래 장례일을 10일로 정했으나 더 많은 사람에게 조문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장례일을 3일 연장한 13일로 정했다.

마더 테레사의 핏줄이 속한 알바니아도 5일 국가애도의 날로 선포하고 국영방송은 조곡을 방송했다. 미국 백악관과 미국 하원도 마더 테레사를 애도하기 위해 6일 1분간 추모 묵념을 올렸으며 미국 상원은 장례일인 9월 13일 국가 추도일로 지정할 것을 6일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국가 지도자들의 추도사와 애도 성명도 잇따라 발표되었다. 인테르 쿠마르 구지랄 인도 총리는 "사랑과 평화의 사도가 세상을 떠난 것에 대해 슬픔을 표현할 길이 없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세계는 가장 큰 것을 잃었다. 테레사 수녀는 이제 우리와 함께 있지 않다. 전세계 특히 인도는 테레사 수녀의 사망으로 더욱 가난해졌다. 마더 테레사의 일생은 세계가 기피하고 소외시켰던 사람들에게 사랑과 평화와 기쁨을 가져다주기 위한 것이었다. 마하트마 간디가 인도에 속하고 자신의 뜻대로 인도를 세웠다면 마더 테레사는 그 인도를 세계의 것으로 만들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사랑의 선교회 총장 니르말라 수녀에게 보낸 조전(ðAi³)에서 마더 테레사의 서거에 깊은 슬픔을 느낀다고 애도하고 "마더 테레사는 20세기의 역사에 기록될 인물이다. 오늘의 교회와 세계에 이처럼 흔들림 없는 신앙을 지닌 사람을 주셨던 하느님께 뜨거운 감사를 드린다."로 말했다. 클린턴 미국 대통령도 "마더 테레사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훌륭한 인물이었다"고 조의를 표했고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도 "세계는 사랑과 열정, 그리고 빛을 잃었다"고 애도했다.

1981년과 85년 마더 테레사가 두 차례 한국을 방문했을 때 만났던 김수환 추기경도 9월 6일 분향소가 마련된 서울 성북구 삼선동의 사랑의 선교회를 찾아 고인을 추모하고 그 후 명동성당에서 추모미사를 집전했다. 특히 김수환 추기경은 사랑의 선교회의 총장수녀 앞으로 보낸 애도와 위로의 편지에서 "테레사 수녀님은 가난한 이들과 병든 이들을 돌보는 일에 생애를 바치신 분"이라고 추모하고 "수녀님의 죽음은 수녀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살아 있는 음성으로 남을 것이며 특별히 그분의 부드럽고 사랑 어린 보살핌을 받던 이들의 가슴속에는 더욱 그럴 것"이라고 말했다.


마더 테레사의 유해는 7일 사랑의 선교회에서 성 토머스 성당으로 옮겨져 일반 조문객들에게 공개되었다. 구지랄 인도 총리를 비롯하여 하루 동안에만 약 3만 5천여 명이 참배했다. 참배객들이 너무 많아 성호를 긋고 헌화할 수 있는 시간이 한 사람 당 1초에 불과한데도 행렬은 1km를 넘게 이어졌다.

장례식은 13일 시신이 성 토마스 성당에서 캘커타의 네타지 수바시 체육관으로 옮겨져 국장으로 거행되었다. 인도의 국장은 대통령이나 총리에게만 해당되는 예우인데, 평민으로서 국장의 예(禮)를 받은 것은 마하트마 간디 다음으로 마더 테레사가 두 번째였다. 마더 테레사의 시신은 간디와 자와할랄 네루 전 인도수상의 시신을 운구했던 바로 그 포가(胞架)에 실려 장례식장인 네타지 체육관으로 옮겨졌다.


이날 장례식에는 코체릴 나라야난 인도 대통령, 클린터 미국 대통령의 부인 힐러리 여사를 비롯해 셰이크 하시나 방글라데시 총리, 도이다카고 일본 사민당 당수, 스페인의 소피아 왕비, 벨기에의 파비올라 왕비, 프랑스의 시라크 대통령 부인 나데트 여사, 코라손 아키노 전 필리핀 대통령 등 세계 23개국의 조문사절이 참석했다.

마더 테레사의 시신은 이날 오후 2시 30분쯤 사랑의 선교회 본부인 마더 하우스의 1층에 마련된 높이 1m의 직사각형 시멘트 상자 속에 안장되었다.

1995년 독일의 마르셀 바우어 감독은 마더 테레사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물었었다.


"어떤 메시지를 유언으로 남기고 싶으십니까?"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시듯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십시오. 그분께서 남기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려면 순수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순수한 마음이 있으면 하느님을 뵙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기도하면 믿음이 깊어지고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이웃에 대한 섬김으로 나타납니다. 또 거기서 평화가 자랍니다. 따라서 기도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사랑과 평화, 한마디로 모든 것을…."


조선일보 기사

"테레사 수녀 장례식 국장으로 치르기로"


# 테레사 수녀의 시신이 일반인들에게 공개된 7일 시신이 안치된 성 토마스 성당에는 인데르 쿠마르 구즈랄 인도총리를 비롯한 3만5천 여명의 조문객이 줄을 이었다. 테레사 수녀는 그녀가 생전에 이끌던 「사랑의 선교회」수녀복과 같은 푸른 줄이 처진 흰색 천으로 덮인 壇위의 유리관 안에서 두 손을 가슴에 모은 채 조문객을 맞고있다. 성당 측은 테레사 수녀의 시신이 부패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성당에 강력한 냉방기를 설치, 가동 중이다. 일반인들의 조문을 받기 위해 선교회 본부에서 캘커타 최대, 최고의 성토머스 성당으로 옮겨진 테레사 수녀의 시신은 장례식을 마친 뒤 다시 선교회 본부의 마당에 안장될 예정이다.

# 성 토마스 성당에는 테레사 수녀의 시신이 옮겨지기도 전인 이날 새벽부터 남보다 앞서 조문을 하려는 추도객이 모여들기 시작했으며 시신이 성당에 도착할 무렵에는 성당주변의 인도를 따라 1KM의 장사진을 이뤘다. 성토머스 성당에서의 일반인 조문은 전날 자정 직전부터 줄을 선 철도회사 직원을 시작으로 1시간만에 수천명의 일반 추도객들이 다녀갔으며 인도의 인기가수 우샤우트프와 영화배우 수닐 두트, 수시미타 센 前미스유니버스 등 유명인사들의 조문도 줄을 이었다. 이날 오후로 접어들면서 비가 많이 내려 조문객의 수가 일시적으로 줄어들기는 했으나 내리는 비를 아랑곳하지 않는 조문객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 「캘커타 빈밀굴의 성녀」로 추앙돼온 테레사 수녀의 장례식이 열리는 오는13일은 그녀의 사망 다음날인 지난 6일에 이어 두 번째 국가 애도일로 엄수될 예정. 이날 모든 旗는 조기로 게양되고 관공서 업무도 중단된다. 캘커타 교구의 관계자는 장례식에 추도객이 몰리는 것에 대비해 장례미사를 성당보다는 1만5천 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실내축구장에서 열 것이라고 전언. 이 축구장은 지난 86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인도를 방문했을 때 신도들에게 연설을 한 곳이기도 하다. 장례식 준비 관계자들은 『캘커타에 거주하는 가톨릭 교도들만 참석해도 장례식장으로 사용될 축구장이 꽉 차게될 것』이라며 벌써부터 장례 당일에 구름처럼 몰려들 추도인파를 걱정. 테레사 수녀의 장례는 「國葬」으로 치러져 보통 국가수반에게만 적용돼 온 완전한 軍의전절차를 밟게되며 다른 나라의 대통령이나 총리가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 구즈랄 총리는 이날 오후 聖토머스 성당에 도착, `그녀를 잃은 인도를 대표해 조문을 하러 왔다`고 밝히고 `테레사 수녀는 수 백만 명의 고통받는 사람들의 눈물을 거둬간 희망이자 등불이었다`고 애도. 그는 또 인도는 금세기 전반기에는 마하트마(위대한 영혼)로 알려진 모한다스간디라는 걸출한 인물이 있었으며 후반기에는 테레사 수녀가 있었다면서 `테레사 수녀가 「사랑의 선교회」를 시작한 인도는 행운의 나라`라는 말로 슬픔에 잠긴 조문객들을 위로.

# 테레사 수녀의 시신이 안치된 聖토머스성당 주변에는 경찰이 배치돼 질서유지를 전담하고 있으나 國葬을 앞둔 11일부터는 군이 직접 나서 치안을 전담할 계획이라고 테레사 수녀의 한 측근이 전언. 군은 또 국장 당일 장례미사가 열리는 운동장과 하관식이 이뤄지는 사랑의 선교회 본부 주변에 대한 치안도 맡을 계획.

# 성 토머스성당 밖에는 테레사 수녀가 돌보던 거리의 걸인들이 몰려와 성당 측에서 조문을 하도록 불러주길 기다리는 눈치. 한 걸인은 `테레사 수녀는 우리가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주었으며 겨울철에는 입을 옷을 제공했다`면서 `그녀가 우리에게 베풀어준 모든 것에 대해 마지막으로 감사의 표시를 하고 싶다`고 눈물. 이 걸인은 그러나 `다 떨어진 남루한 옷차림으로 다른 조문객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서 어떻게 함께 서있을 수 있겠느냐`면서 더러운 옷차림 때문에 감히 조문대열에 끼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하소연.


출처 : http://www.hanmiinfo.co.kr/knowledge10.htm야후 " 마더 대레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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