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이란

Story 2017. 2. 28. 18:23

3.1절을 알기전에 경술국치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끝까지 꼭 읽어 보세요

경술국치
1909년 7월 6일, 가쓰라 일본 총리가 일본 내각회의에 제출한 「대한제국 병합에 관한 건」이 최종 확정되었다. 그간 일본 지도자들 사이에 병합 단행 시기와 관련하여 존재했던 이견은 이보다 앞서 4월에 이토가 병합 단행에 찬성함으로써 이미 해소된 상태였다.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 등 문치파들이 국제열강의 눈치를 살피며 신중하게 일을 처리하자고 주장한 반면,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데라우치 마사타케 등 무단파들은 이토의 점진적인 병합 정책을 비판해왔다. 대륙 침략에 적극적인 재야 세력들도 이토 통감의 대한(對韓) 정책에 불만이 많았다.
하지만 이토 등 문치파들도 병합을 최종 목표로 삼고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다만 대한제국을 병합하기에는 아직 일본의 재정 능력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대한제국이 국제법적으로 보호국 상태인 만큼 열강의 주시를 무시하지 못한다는 두 가지 이유에서 병합에 신중을 기했을 따름이다. 실제로 일본은 러일전쟁 이후 막대한 전쟁 비용에 대한 상환 부담으로 재정적으로 매우 곤궁한 상태였으므로, 병합 단행에 충분한 여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국제 정세 면에서도 여전히 만주 문제를 둘러싸고 미국, 러시아 등과 갈등이 계속되고 있었으므로 이토 등의 신중론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이토의 점진론을 ‘보호국 체제 유지론’으로 오해한 강경 세력들의 반발과 비판이 끊임없이 제기되면서, 결국 이토도 1909년 4월 10일 총리대신 가쓰라, 외무대신 고무라와의 회합에서 마침내 병합 단행에 이의가 없다는 견해를 표시했다. 이토는 6월에 통감직을 사임하고 귀국했으며, 일본 각의(閣議)는 이미 3월 30일자로 가쓰라 총리가 제출해놓은 「대한제국 병합에 관한 건」을 7월 6일 결정했다. 장차 적당한 시기에 대한제국 병합을 단행할 것이고, 그 시기가 도래할 때까지 충분히 실권을 확보하는 데 노력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으로 병합 방침이 결정되고, 병합을 위한 구체적인 준비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이때 마련된 「대한(對韓)시설대강」에 의하면, 향후 준비할 항목으로 첫째, 대한제국 방어 및 질서 유지를 담당할 군대를 주둔시키고 가능한 한 다수의 헌병 및 경찰을 증파하여 충분히 질서를 유지할 것, 둘째, 대한제국에 관한 외국과의 교섭 사무를 파악할 것, 셋째, 대한제국 철도를 일본제국 철도원 관할로 이관하고 그 감독하에 남만주 철도와 밀접한 연락을 가지게 해서 일본 대륙 철도의 통일과 발전을 도모할 것, 넷째, 가능한 한 다수의 일본인을 대한제국에 이식하여 일본 실력의 근저(根柢)를 깊이 함과 동시에 일한 간 경제 관계를 밀접히 할 것, 다섯째, 대한제국 중앙 관청 및 지방 관청에 재임하는 일본인 관리의 권한을 확장해서 한층 민활한 통일적 행정을 기할 것 등이었다.
병합을 실행하는 데 필수적인 치안 질서의 유지뿐 아니라 병합 이후 식민통치를 위한 준비, 나아가 일본-한반도-만주 간 철도 연결까지 구상함으로써 대한제국 병합을 교두보 삼아 대륙 침략에 나설 의도를 분명히 했다.
하지만 이처럼 내부적으로 병합 방침을 결정한 뒤에도 즉각 병합이 단행되지는 않았다. 여전히 병합 단행의 시기는 유동적이었으나 간도 문제를 둘러싼 청일 간의 긴장과 구미열강의 간섭 우려 때문에 보호국 상태에 불안을 느낀 일제는 결국 병합 시기를 앞당기게 되었다.
일제는 1910년 2월 일본의 해외 공관에 대한제국 병합 방침 및 시설대강을 통보하고, 3월에는 만주 문제에 대해 러시아와 제2차 협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러시아는 4월에 대한제국 병합을 승인한다는 의사를 표시했고, 영국도 5월에 병합을 승인했다. 그간 병합 단행을 지연시켜온 하나의 요인인 국제열강의 승인 문제가 해결되자, 이제 병합은 행정적인 절차만을 남겨놓은 상태가 되었다.
5월 30일 일제는 병합을 단행할 인물로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통감에 겸임 발령하고, 6월 3일에는 각의(閣議)에서 대한제국에 대한 시정 방침과 총독의 권한 등을 확정했다. 이 방침에 따르면, 병합 후 당분간은 일본 헌법을 시행하지 않고 대권에 의해 통치하되, 총독은 천황에 직속하여 일체의 정무를 통할하고, 또한 대권의 위임에 의해 법률 사항에 관한 명령을 발할 권리를 갖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일본 헌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대만처럼 ‘분리주의’ 원칙에 입각하여 식민지 총독에게 특수한 독자적인 위상을 부여한다는 의미였다.
병합 실행에 필요한 경비는 일단 일본 정부의 예비비로 지출하지만, 향후 총독부 회계는 특별 회계로서 총독부 경비는 한국에서의 세입으로 충당함을 원칙으로 했다. 다만 당분간은 일정한 금액을 일본 정부가 보충해주기로 했다. 병합에 따른 일본 정부의 재정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또한 통치 행정 분야에서 정치 기관은 최대한 간이하게 개폐하고, 통감부 및 대한제국 정부에 재직하는 일본인 관리 중 필요 없는 자는 귀환 혹은 휴직시킴으로써, 최소한의 기구와 인력으로 효율적인 식민통치를 실시하려고 했다.
마지막으로 병합조약 체결에 대한 한국민의 저항을 제압하기 위해 6월 24일에는 경찰권 위탁에 대한 각서를 요구했고, 6월 30일자로 대한제국 경찰을 폐지했다. 1907년 신협약 체결 이후 이미 대한제국의 치안경찰권은 일제가 완전히 장악한 상태였지만, 보다 강력한 경찰력 확보를 위해 주차군 헌병대 산하에 통합시키기로 한 것이다.
이런 모든 준비를 끝낸 신임 총독 데라우치는 7월 23일에야 대한제국에 들어왔다. 착임 후에는 일단 헌병경찰을 동원하여 일체의 정치적 집회나 연설회를 금하고, 이를 어기는 경우 가차 없이 검속, 투옥하는 등 숨도 함부로 쉬지 못할 만큼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리고 8월 16일 드디어 대한제국 정부의 총리대신 이완용을 통감 관저로 불러 병합조약 체결을 위한 담판을 개시했다.
데라우치가 병합조약안을 수교하자 이완용은 그에 대부분 동의하면서도 국호를 조선으로 개칭하는 문제와 황실 존칭 문제에 대해서만은 이의를 제기했다. 현 황제를 병합 이후 이태공이라 부르자는 일본 측 제안에 대해, 이완용은 이왕 전하라는 명칭을 고집했다. 그러나 그것은 일본과 병합조약을 체결하는 당사자로서 체면을 유지하고 황실 및 원로들의 반발을 완화시키려는 제스처에 불과했다. 일본 측도 원활한 교섭을 위해 이완용의 체면을 세워줄 필요가 있었으므로 황실 칭호 부분만은 양보했다.
그 결과 병합조약안은 별다른 수정 없이 8월 18일자로 대한제국 정부의 내각회의를 통과했고, 8월 22일에는 형식적인 어전회의를 거쳐 이완용이 전권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을사늑약 당시 고종이 끝까지 조약에 사인하지 않았고 외부대신에게 위임장을 내리지도 않아서 두고두고 무효설을 주장했던 경우를 거울삼아, 이번에는 형식적 절차를 제대로 밟으려고 노력하는 듯했다. 같은 날 이완용과 데라우치 통감 사이에 병합조약이 조인되었다. 그리고 8월 29일자로 다음과 같은 내용의 한일병합조약이 공포되었다.
「한일병합조약」
제1조 대한제국 황제 폐하는 대한제국 전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하고도 영구히 일본국 황제 폐하에게 양여한다.

제2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이 양여를 수락하고 대한제국 전부를 일본제국에 병합하는 것을 허락한다.

제3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대한제국 황제 폐하, 태황제 폐하, 황태자 전하 및 후비(后妃), 후예에게 각기 지위에 상당하는 존칭, 위엄 및 명예를 향유하게 하고 또 이를 보유하는 데 충분한 세비(歲費)를 공급할 것을 약속한다.

제4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전항 이외에 대한제국 황족 및 그 후예에 대해 각기 상당한 명예 및 대우를 향유하게 하고 또 이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제공할 것을 약속한다.

제5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훈공이 있는 한국민으로서 특히 표창하기에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자에 대해서는 영작(榮爵)을 주고 은금(恩金)을 공여한다.

제6조 일본국 정부는 병합의 결과로서 완전히 대한제국 시정을 담임해 동지(同地)에 시행하는 법규를 준수하는 한인(韓人)의 신체 및 재산에 대해 충분히 보호를 제공하고 또 그 복리 증진을 도모한다.

제7조 일본국 정부는 성실하고 충실하게 신제도를 존중하는 한인으로서 상당한 자격 있는 자를 사정이 허락하는 한 제국 관리에 등용한다.

제8조 본 조약은 일본국 황제 폐하와 대한제국 황제 폐하의 재가를 얻어서 공포하는 날로부터 시행한다.
이상 8조로 이루어진 한일 간 병합조약의 체결로, 대한제국 2천만 동포의 운명은 간단히 일본 제국주의자의 발길 앞에 내동댕이쳐졌다. 나라 전체를 들어 이민족에게 맡긴 대신 얻은 것이라곤 극소수 황실 가족들의 품위 유지비와 몇몇 친일파 관리들에게 주어진 작위와 은사금이 전부였다. 나머지 무고한 일반 민중들은 오로지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은총에 신체와 재산을 맡겨야 하는 식민지 백성의 처지로 전락했다. 병합 이후에도 ‘내정자치’를 희망하며 스스로 합방을 청원하기까지 했던 친일 정치 세력들도 ‘성실하고 충실하게’ 일본 통치를 따르는 경우에 ‘사정이 허락하는 한’ 등용되는 것으로 간단히 정리되었다.
일제는 병합과 함께 대한제국 황실과 고위관료, 재야의 명망 있는 정객 등 76인에게 작위를 수여하고 이들을 장차 식민통치의 정치적 기반으로 삼고자 했다. 이재완 · 이재순 · 이지용 등 황족과 윤덕영 · 윤택영 등 순종비의 친정 식구, 그리고 왕실의 부마였던 박영효, 민영준 · 민병석 · 민영달 등 민씨 척족, 이완용 · 이하영 · 박제순 · 이근택 · 한규설 · 홍순형 · 조경호 · 윤용구 등 고위관료, 개화파 중에서는 김윤식 · 조희연 · 유길준, 일진회의 송병준 등이 작위를 받았다. 이중 한규설 · 유길준 · 홍순형 · 김석진 · 민영달 · 조경호 · 조정구 · 윤용구 등은 작위를 반납했다. 일제에 의해 국호는 다시 조선이 되었고, 대한제국 13년의 짧은 역사는 막을 내렸다.

1919년 3월 1일, 한민족이 일본의 식민통치에 항거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한국의 독립 의사를 세계 만방에 알린 날을 기념하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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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주요참사 사건

Story 2016. 11. 30.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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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들을 때 느끼는 저마다의 감흥이 있을 것이다.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나에겐 음악이란 내 삶이요, 내 벗이요, 또한 나 자신이다.

나의 인생을 더욱 풍성하게 가꾸어 준 한사람이 엔니오모리꼬네였다.

엔니오모리꼬네의 내한공연이 있다는 소식은 진작에 들었지만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많은 고민 끝에 뒤늦게 표를 예매하고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그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랬다.

내 심장을 울렸던 음악을 그리고 그 감동을 직접 느낄 수 있는 찬란한 순간을 기대했다. 음표에서 퍼져 나오는 음악이 나를 곡의 세계로 인도하고 나는 음악을 온 몸으로 느끼며 하나가 되는 것을 기대했다. 엔니오모리꼬네의 음악은 나의 상상력을 맘껏 발휘하도록 나를 부추기는 자극제 같은 것이다. 눈을 감고 모든 신경세포가 귀에 집중하고 음악에서 흘러나오는 선율을 느끼고 있노라면 나의 피는 뜨겁게 달궈지고 심장의 아래쪽에서 움찔거리는 떨림을 느낄 수 있다. 그 순간 눈가를 촉촉이 적시는 맑은 영혼의 결정체가 피어난다. 잡히지 않는 가치로운 진동이여라. 이것이 엔니오모리꼬네 음악의 가치이다.

공연 날 느꼈던 감동은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는 적었다.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공연 날처럼 짧은 시간동안 엔니오모리꼬네 음악을 신경을 곤두세우며 악기 하나하나의 음을 들어보려고 노력한 적이 없었다. 전체적인 분위기와 순간 느끼는 감동을 즐겼을 뿐 그 음악을 완성시키는 여러 가지 악기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귀로만 즐기는 음악보다는 눈과 귀, 두 가지 감각을 일치시키며 느끼는 음악은 더욱 아름답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기분 좋은 분을 알게 되었다. 나와 비슷한 것이 많은 그는, 싱그러운 미소와 따뜻한 눈웃음이 매력적인 사람이다. 대화가 끊이지 않게 화제를 바꿔가며 작은 것에도 신경써주는 세심한 배려가 기분 좋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입가에 미소를 짓는 내 자신을 발견 할 수 있었다.


2007년 10월 3일... 특별하고 신선한 경험..절대 잊지 못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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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
(Che Guevara, 1928년 6월 14일 ~ 1967년 10월 8일)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사회주의 혁명가이다. 원래 이름은 에르네스토 라파엘 게바라 데 라 세르나(Ernesto Rafael Guevara de la Serna, 문화어: 에르네스또 체 게바라)이다.

 

생애

아르헨티나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사회주의를 따르지는 않았지만 진보적인 사고를 갖고 있었다. 1952년에 볼리비아인민운동에 참가하여 외국자본의 국유화를 위하여 투쟁하였으며, 1953년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의학대학을 졸업한 후 과테말라로 가서 독재정권을 반대하는 투쟁을 하다가 1954년 멕시코로 망명하였다. 체 게바라는 1955년, 망명지 멕시코에서 자신처럼 망명하던 쿠바 사회주의 혁명가들과 알게 되였으며 그 때로부터 쿠바혁명의 승리를 위하여 그들과 함께 투쟁하였다.

1956년 12월 피델 카스트로가 이끄는 쿠바혁명가들과 함께 《그란마》호를 타고 쿠바에 상륙한 후 친미 독재정권이자 미국의 꼭두각시인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반대하는 쿠바혁명에 참가하며 대대를 이끌어 사회주의 혁명을 이룩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당시 카스트로는 다른 좌파 혁명가들과 함께 벌인 사회주의 혁명운동에 실패하여 감옥살이를 했었는데-이때 피델 카스트로는 판사 앞에서 역사가 나중에 나를 다시 평가할 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한다.-체 게바라등의 동지들의 참여로 다시한번 혁명에 도전하였다. 그리고 바티스타 독재정권은 미국의 꼭두각시요 부패한 독재정권이어서 민중들의 외면속에 역사속으로 사라질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쿠바혁명 승리후 쿠바 공산당쿠바 혁명정부의 중요직책에 있으면서 쿠바혁명에서 얻은 것들을 지키며 혁명을 더욱 전진시키기 위하여 정력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쿠바혁명승리후 얼마간 아바나의 라 까바니아요새수비대 사령관으로 있다가 산업발전을 조종하는 책임자로 있었으며 동시에 토지개혁의 준비에 참가하였다. 1959년 11월∼1961년 2월에 쿠바국립은행총재, 1961년 2월부터 쿠바산업부장관도 함께하였으며 1962년에 쿠바통일혁명조직 전국지도부 및 비서국에서 일했다. 하지만 그는 쿠바에서 많은 일들을 했음에도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일을 찾아 떠났다. 즉, 1965년 4월부터 쿠바를 벗어나 볼리비아로 투쟁무대를 옮겨 바리엔토스 정권을 상대로 게릴라전으로 투쟁했으나, 1967년 10월 9일 미국이 가담한 볼리비아 정부군에게 잡혀 총살당했다.그의 시체는 30년후 발굴되어 그가 혁명가로 활동했던 쿠바에 안장되었다.

Ernesto Guevara de la Serna
June 14, 1928October 9, 1967
Image:Famousphotoche-cropped.jpg
Alberto Korda's famous photograph


1950년대에 그가 공부를 마치기 전에 다닌 여행이야기가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라는 영화로 2004년에 출시된 바가 있다. 그에게 오토바이 여행은 관광이나 배낭여행이 아닌, 억압받고 가난한 그리고 한센병으로 고통받는 인디오들과 민중들의 아픔을 이해하는 기회였다. 물론 여행에서 쌓은 경험이 사회주의 혁명의식의 뿌리가 되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의 민중에 대한 사랑은 현재 민중들이 체 게바라를 목수의 아들답게 민중들과 동고동락한 예수 그리스도에 빗댈정도로 존경받게 한다


비판적시각

체 게바라는 혁명가로서는 활약했지만, 취약한 점도 있었다. 그는 볼리비아 혁명당시 사상적 동지인 볼리비아공산당의 지원과 지역주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체 게바라(Che Guev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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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절의 의미

Story 2007. 10. 2. 19:20


10월 3일은 우리 국민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개천절 (開天節)입니다.  개천절 이 시작된 것은 국조단군을 모시는 대종교에서 1900년 1월 15일 교문(敎門)을 다시 열면서 단군조선을 건국하였음을 기리는 날로 정하여 경하식을 거행하는데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의  개천절  행사는 일제강점기의 암울했던 식민지배하의 상황에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상해임시정부에서도 이날을 국경일로 정하였으며 광복 후에는 대한민국정부가 계승하여 음력 10월 3일에 지내던 행사를 양력 10월 3일로 바꾸어 지금의  개천절 이 되었습니다.

 
 
  개천절 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나

 단군성조께서 조선을 개국한 날이기에 이 날을 기념하고 기뻐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개천절 이 단군성조께서 나라를 열기 훨씬 이전부터 있어 왔음을 아는 사람은 아주 적습니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단군왕검께서 조선을 개국하시기 이전부터 동이족의 역사는 존재했었는데, 환국(3301년), 배달국(1565년), 단군조선(2096년)으로 이어져 내려온 시대를 우리는 삼성조 시대라 이야기합니다.
 
 바이칼 호수지방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땅을 3301년 동안 7대 환인천제께서 다스렸던 나라의 이름이 환국(桓國-광명의 나라)이었습니다. 백성들은 밝음을 숭상하며 하느님의 자손이라는 긍지를 가지고 천손민족(天孫民族)의 의식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인류의 시원문명국가인 이 환국은 약 5900여 년 전, 기후변화로 인해 나라를 이루고 있던 9부족들의 일부가 이동을 하게 됩니다. 이 때 환국의 마지막 환인이신 ‘지위리’ 환인으로부터 정통성의 상징인 천부인 3개를 받은 환웅께서 문명 개척단 3000명을 거느리고 태백산(지금의 백두산)에 오시어 신단수 아래 도읍을 정하고 신시를 열게 되었으니 이것이 신시배달입니다.
 
 이때 환웅천황은 하늘에 천제를 드리며 나라를 개국하는데, 이 날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10월 3일  개천절 입니다. 신시배달은 환국의 광명사상을 그대로 계승을 하여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 광명개천(光明開天)의 3대 정신으로 백성들을 교화하며 1565년간 지속되었습니다. 이 배달국을 우리는 진정한 한민족사의 기원으로 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개천절 은 단군조선의 건국일이 아닌 신시배달의 건국일이며, 단군의 건국이념으로 알고 있는 홍익인간, 제세이화의 광명사상 또한 배달국의 가르침이라는 것을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 제사 올리는 천제문화
 배달국은 인류 시원문명국가인 환국시대 환인천제의 정통정신을 계승한 장자국으로서 하느님께 제사를 올리는 천제의식을 통해 감사를 드리고, 신의 가르침을 받아 인간을 다스려왔습니다. 그것을 이신설교(以神說敎)라 하는데, 줄여서 ‘신교’라 부릅니다. 신교는 우리 민족의 삶과 함께 해온 종교로서 환국, 배달국 시대에는 신교나 배달도라 불렀으며 고조선 때는 풍류도라 하였습니다.
 
 이를 두고 신라의 최치원은 화랑의 유래를 밝힌 ‘난랑비서문’에서 ‘우리민족이 닦아온 현묘한 도는 유불선 삼교정신을 모두 포함하는 풍류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시배달의 신교의 맥은 고조선을 거쳐 고구려로 전해졌으나, 당나라의 힘을 빌린 신라의 삼국통일을 계기로 더 이상 전해지지 못하게 됩니다. 대진국(발해)으로 이어진 한 맥도 대진국의 멸망과 함께 단절되고 말았습니다. 다만 그 흔적은 남아서 이후 불교를 국교로 한 고려와 유교를 숭상하던 조선시대에서는 각각 ‘복원관’과 ‘소격서’를 두어 상제님께 천제(天祭, 太乙祭)를 올려왔습니다.
 
 역대의 제왕들은 제위에 오를 때 반드시 하늘의 상제님께 먼저 제사를 올렸는데, 한말의 고종임금께서도 민족의 자긍심을 높이기 위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위에 오를 때 원구단을 쌓고서 천제를 올려 하늘에 알렸습니다. 그 유적은 지금도 서울의 조선호텔 자리에 남아있습니다. 이처럼 천제는 우리에게 남아있는 몇 안 되는 신교문화 즉, 상제문화의 발자취인 것입니다.
 
 옛날 우리 어머니들이 정갈한 곳에 정화수를 떠놓고 두 손을 비비며 하늘에 정성을 드리는 모습, 관아래 칠성판을 깔고서 그 위에 시신을 얹어 장례를 지낸 것 등도 모두 신교문화의 유산입니다.
 
 지배층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천제를 지내듯 평민들은 고을마다 제천의식을 행하였습니다. 오곡이 풍성한 가을철에 수확을 하고나서 지신(地神)과 곡신(穀神) 그리고 상제님께 감사행사를 가졌습니다. 10월 상달에 지냈던 이 행사가 우리가 알고 있는 고구려의 동맹, 부여의 영고, 백제의 교천 그리고 삼한의 불구내 등입니다. 사람들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나서 그 뒤풀이로 음주가무의 풍류를 즐겼습니다.
 
 이런 관습은 오늘날의 추석명절 속에 그 자취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해 수확한 햇곡식을 조상에게 먼저 천신(薦新)한 다음 온 가족이 음복(飮福)을 하고 마을 사람들이 모여 줄다리기나 씨름, 강강술래 등의 놀이를 통해 흥을 돋우는 풍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올해는  개천절 과 추석이 연이어 있어 국내외 여행지를 찾는 사람이 많아 항공편 티켓을 구하기 힘든 상황이라 합니다. 오랜만에 맞은 긴 연휴를 이용해 여행을 떠나는 것도 좋지만, 이 땅에 나라를 열고, 하늘의 상제님께 천제를 올리고, 또 나의 뿌리 되는 조상님께 제사 올리던 그 정신마저 퇴색되는  개천절 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자신과 민족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올바른 역사관을 바탕으로 미래를 바라볼 때 비로소 스스로의 자긍심은 물론이요, 후손들에게도 더욱 떳떳하고 값진 재산을 물려줄 수 있습니다. 한민족의 역사가 열린  개천절 을 맞이하여 선조들의 그 정신을 다시금 되새겨 봅니다.
 

ⓒ증산도 본부, 월간개벽 2006.10월호




 
 겨레의 뿌리를 마음에 되새기는 날
  개천절은 모든 국경일 가운데 으뜸이 되어야 할 날이다. 우리 겨레의 뿌리를 마음에 되새기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개천절은 모든 국정공휴일 가운데 가장 초라한 행사로 끝나는 날이다. 지금의 한국사람은 이 나라와 이 겨레 생긴 날보다 예수님, 석가님 탄생일에 더 큰 의미를 두며 그날은 온 나라가 법회와 크리스마스 행사로 들썩거린다.
 
 환웅, 단군 할아버지께서 아시면 섭섭하시겠지만, 당신의 후손들 대부분은 개천절을 쉬는 날 정도로 아주 단편적으로 알고 있을 뿐 그 유래도 모른다. 그날 단군 할아버지를 기리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 나라, 이 민족의 소자출도 모르고 관심도 없다. 심지어 이런 볼멘소리까지 한다. 우리는 단일민족이 아니며 여러 피가 뒤섞인 혼혈잡종이므로 단군의 직계후손이 아니라고, 그러니 시조(始祖)니 국조(國祖)니 따위의 말도 과감히 없애자고. 환웅할아버지 단군할아버지 찾는 것은 편협한 국수주의 발상이요, 사상과 종교의 자유가 있는 이 나라의 국민적 화합을 해치는 쓸데없는 짓이라고….

 월드컵도 치르고 제법 국제무대에 설 만큼 나라 껍데기는 미끈해졌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기억상실증에 걸려 있는 셈이다.
 
 
 환웅천황께서 배달(倍達)이라는 국호로 나라를 개국하신 날
 ‘개천절’(開天節)은 실존인물이셨던 환웅천황께서 지금으로부터 5900년(=2002+2333+1565) 전 백두산 신시(神市)에서 배달(倍達)이라는 국호로 나라를 개국하신 날을 일컫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민족이 배달겨레가 된 날이다. 지금도 배달겨레라고 부르지 않는가?
 
 10월(上月) 3일은 원래 단군 할아버지께서 지금으로부터 4335년(=2002+2333) 전에 조선(朝鮮)을 개국하신 날이다. 이날은 우리 겨레가 단군의 자손이요 조선민족이 된 날이다. 그리고 이날 단군성조께서는 조선 강역을 삼분(三分)하여 삼한(三韓: 韓國)이라 하셨으니, 우리 민족이 비로소 한국사람이 된 날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개천절은 10월 3일이 아니다. 개천절에 단군성조를 기념하는 것은 역사단절이 빚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민족이 배달겨레가 맞다면, 정확히 말해서, 개천절은 환웅천황께서 인류문명을 개벽하신 날이며(開天立敎), 개벽정신으로 배달나라를 창건하신 날로 의미를 부여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역사를 잃어버려, 배달국을 연 개천의 의미는 아예 사라져 버리고 다만 단군성조의 조선 개국의 의미만이 어렴풋이 남아 있을 뿐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역사 기록 속의 개천(開天)이란 말을 통해, 우리의 선조들이 개벽원리를 일상 속에 생활화했음을 확인해 보자.

 『태백일사』 「환국본기」에 이르기를, “대저 일체의 천지만물은 ‘개벽운동’으로 삶이 열리고, ‘진화운동’을 따라 삶의 변화와 발전이 이루어지며, 천지일월이 ‘순환운동’을 하여 만물이 존재할 수 있게 된다”(凡天下一切物, 有若開闢而存, 有若進化而在, 有若循環而有: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고 하였다.
 
 이처럼 태고적 우리의 선조들은 저 광활한 우주심연을 거닐며 인생의 본질적 의미를 깨우치셨다.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 광명이세(光明理世)… 고대의 어떤 민족이 이같은 인류보편정신을 나라의 창건이념으로 내걸었던가? 우리 선조들이 품었던 숭고한 이상을 우리 겨레가 재현하게 될 그날은 언제인가?

 글·유내윤(kifv-a@hanmail.net)
 
 
 개천(開天)의 뜻

 (출처: 조선 중종 15년 이맥(李陌)이 찬술(撰述)한 『태백일사』의 「신시본기」)

 개천(開天) - 성인을 보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개천’이다. 하늘의 뜻을 밝혀 역사의 새 시대를 열어줌으로써, 능히 만물의 질서를 창조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곧 이 세상이 하늘의 뜻(천리)과 부합되어 일체가 되는 것이다(虛粗同體).
 [遣往理世之謂開天, 開天故, 能創造庶物, 是虛之同體也]
 
 개인(開人) - 인간세상을 사랑하여 크게 발전시키려 하는 것이 ‘개인’이다. 사람들의 마음자리를 열어주어 새 진리로 도덕을 세움으로써, 기강과 질서가 바로잡혀 세상일이 순환하게 된다. 이로써 육신과 함께 영혼이 성숙해간다(形魂俱衍).
 [貪求人世之謂開人, 開人故, 能循環人事, 是魂之俱衍也]
 
 개지(開地) - 산을 다스려 길을 내는 것을 ‘개지’라 한다. 땅을 개척하고 만물의 질서를 바로잡음으로써, 1년의 4시와 때에 알맞은 일을 지어서 세상일이 변화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개척의 삶을 통해 지혜를 함께 닦게 된다(智生雙修).
 [治山通路之謂開地, 開地故, 能開化時務, 是智之雙修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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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샤를루아 市에 거주하는 10살 소녀가 아기를 출산했다고, 28일 해외 언론들이 보도했다. 아기의 아빠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13살 소년.

산부인과 의사 로버트 셰프는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소녀와 어머니는 전혀 임신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말했다.

소녀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복통에 시달렸다. 또 체중이 불었다. 소녀의 어머니는 다이어트를 시도하도록 권하기도 했다. 그러나 체중은 줄지 않았고 소녀와 어머니가 병원을 찾았을 때, 임신 9개월인 것이 확인되었다.

소녀와 어머니는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으나, 출산은 순조롭게 이루어져 엄마보다 10살 어린 남자 아이가 태어나게 되었다.

13살의 학교 친구인 ‘아빠 ’도 병원을 여려 차례 찾았다. 소녀의 어머니는 화를 내지 않았으며, 난데없이 태어난 ‘손자’를 직접 기르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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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단가에 대한 얘기가 많네요...
 
실제로 저도 느끼고 있습니다.
 
예전에 비해 좀 하락한 부분이 보입니다.
 
지난달 클릭당 200~150원정도가 되었지만 이번달 130~60원 정도를 보여주는듯 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몇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달러의 환율 하락
예전에 구글광고가 최적가가 70원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최저가가 80원이 되었습니다.
환율이 예전에 비해 약 10%정도 하락했습니다.
그만큼 사용자에게도 적에 돌아오는 부분이 있을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 구글 애드센스 사용 홈페이지의 증가
홈페이지가 증가하면 그 만큼 가격 경쟁에서 떨어지게 됩니다.
같은 키워드로 적용할 수 있는 홈페이지가 그만큼 늘어나는것이죠.
그 이유로 최저가의 광고가 달릴 확율이 더욱 높아집니다.
 
3. 광고의 위치 설정
예전에 테스트겸 한두개씩 달던 홈페이지, 블로그가 많았으나 요즘은 적극적으로 달고 있습니다.
애드센스는 한 페이지에 여러개가 걸릴경우 자체적으로 경쟁을 하게 됩니다.
HTML코드상에 제일 위에 있는 광고가 가장 비싼 광고가 됩니다.
하지만 제일 위에 클릭하기 힘든 광고를 달고 아래에 여러가지 많은 광고를 달면 단가는 떨이지게 됩니다.
 
4. eCPM의 하락?
eCPM의 기준을 잘못 생각하시는분들이 많습니다.
다른분도 말씀하셨듯이 eCPM가 클릭당 단가의 기준이 아닙니다.
1000번의 페이지뷰가 일어났을경우 해당 금액이 들어온다는 뜻입니다.
만약 2만번의 페이지뷰가 있고 eCPM가 0.1 일경우 2달러받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클릭수만 증가했는지 페이지뷰도 늘어나고 클릭수도 늘었는지 확인해보셔야 합니다.
 
5. 무효클릭의 증가
애드센스에서 무효클릭도 클릭 숫자가 올라가는 경우도 있는것으로 보입니다.
무효클릭으로 처리되면 클릭수는 많더라도 가격은 고정됩니다.
그래서 클릭수에 비해 가격이 떨어져 보일 수 있습니다.
 
6. 초기 클릭의 비중
애드센스는 초기 적은 클릭이 있어났을때 클릭당 수익을 좀더 많이 주는듯합니다.
확실하진 않지만 초기 한두번 클릭의 금액과 나중에 수십번 클릭이 있어났을때 단가의 차이가 일어납니다.
광고로 인한 실적 전환을 평가하여 광고비가 제측정 된다는 말도 있지만 이부분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7. 애드워즈(광고주) 기능의 추가
애드센스의 기능이 늘어난것처럼 애드워즈의 기능도 많이 추가되었습니다.
원하지 않는 사이트의 광고를 피할 수 있고 특정단어가 들어간 페이지도 피할 수 있습니다.
최저의 가격으로 최대의 효과를 내기위한 여러가지 방법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전환추적기능도 발전하여 어떤 키워드가 실제로 광고주에게 도움을 주는지 파악하여 단가도 조절하고 있습니다.
대형사이트에게 고급 광고가 달리게 되고 그에비해 점차 블로그같이 실적이 낮은곳은 광고비가 떨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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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鸽子','gē zi'鸽子  끄어즈 (gē zi) 는 중국어로 비둘기를 말합니다.

그러니 끄어즈탕은 비둘기탕을 말하겠죠? ^^

아까 동안클럽 내용에서도  번식력이 뛰어나다고 말했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비둘기를 보면 번식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아시겠죠? (어딜가나 비둘기가 많죠?)

비둘기탕이라고 합니다~~


아래는 재료 (닭고기 같은데 ㅋㅋ)




완성품입니다 ㅎㅎ 맛있으려나 -_-


내용출처 : 본인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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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기간 일본 해군의 깃발이었던 욱일승천기

욱일승천기는 일본의 해군 내에서 2차세계대전 당시에 사용하던 깃발 이름입니다.

태양과 햇살을 형상화한 이 기는 일본의 정식 국기인 일장기와는 다르지만

다른 이름으로 대동아기하고도 합니다.

이 깃발은 일본의 군국주의를 상징하는 그런 의미가 담긴 깃발입니다.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을 꾀하는 사람들을 대표하는 깃발이기 합니다.

이런내용을 상징하는 욱일승천기를.....

이걸 아는 사람들이 TV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입고 나오다니

아무리 군국주의를 조롱하기 위해서라는 변명을 하지만

생각을 하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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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배달(본명 최영의), 일본명 오야마 마스다쓰. 그에 관한 수식은 쉽게 압축할 수가 없다. 전설의 파이터, 신의 손( God’s Hand ), 가라테마스터, 소뿔을 꺾은 사나이에서 바람의 파이터라는 제목까지. 한 사람에 붙여지는 수식이라고 하기에는 다분히 많은 숫자지만 그 정도로 최배달은 존경 받는 무도가로서의 생을 살았다. 영화 <바람의 파이터>를 통해 다시 한번 재조명 되고 있는 최배달, 그의 삶은 대체 어떠했길래 아직까지도 우리를 흥분하게 만드는 것일까?

하늘을 나는 파일럿은 되지 못했지만

1923년 전라북도 김제군 용지면 와룡리에서 태어난 최배달은 어렸을 때 겁이 많은 소년이었다. 그래서 곧잘 일본아이들에게 놀림을 받곤 했는데 부농이었던 아버지가 고용한 하인에게서 차력, 혹은 중국무술인 남권을 익혔다고 한다. 1938년 16살이 되던 해 최배달은 어릴 적 꿈이었던 파일럿이 되기 위해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현해탄을 건넌다. 일본 야마나시 소년 항공학교에 입학하게 된 최배달은 이때 처음으로 가라테에 입문하게 된다.

1945년 당시 일본은 패망 후 모든 것이 부족했고, 인심은 극도로 흉흉해져 있었다. 최배달 역시 춥고 배고픈 낭인시절을 보내야만 했는데 어느 날, 도쿄 시부야 공원에서 위험에 처한 야쿠자 보스를 구출하게 되어 6개월간 그의 보디가드로 활동하게 된다. 하지만 야쿠자들의 방탕한 생활에 회의를 느낀 그는 재일교포 단체인 거류민단에 투신하게 된다. 또한 일본에 체류하면서 수많은 폭행 사건의 주범이던 미군들로부터 겁탈의 위험에 처한 일본 여인들을 구해내 ‘구라마덴구(막무시대의 영웅)’ 이라 불리며 처음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다. 그 덕분에 그는 CID(범죄수사국)에 수배를 받게 되었고, 훗날 입산수도의 원인 중 하나가 된다.

미야모토 무사시의 가르침대로

미국범죄수사국의 추격을 받으며 고된 낭인생활을 지속하던 그에게 또 한번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온다. 그것은 에도 시대 검의 달인 미야모토 무사시의 사상이 담긴 오륜서 한 권이었다. 미야모토 무사시의 “힘없는 정의는 무능하고 정의 없는 힘은 폭력이다” 이라는 한 구절은 자신과 세상을 뛰어 넘고자 하는 의지를 만들어냈고 그는 그 길로 지바현 남부에 있는 기요즈미 산으로 뼈를 깎는 수련의 길을 떠나게 된다.


입산수련 과정에서 그는 두 손가락으로 물구나무를 서고 딱히 상대가 없던 산속에서 참나무와 폭포의 얼음덩어리, 돌덩어리들을 부수기 시작했다. 속세가 그리웠지만 그때마다 한쪽 눈썹을 번갈아 밀며 자신을 세상과 격리시키며 의지를 다졌던 최배달은 미친듯이 뛰고 닥치는 대로 격파했다. 그리고 자신을 버리는 것이 진정한 비워 있음(空)이라는 깨달음을 얻는 순간 그는 끝끝내 깨지지 않았던 자연석 격파에 성공하며 고단했던 입산수도를 마치고, 일본무도계 정벌의 첫발자국을 내딛게 된다.

무도여행

최배달이 기요즈미산에서 하산한 1947년 봄, 쿄도 마루야마 공화당에서는 패전의 울분을 씻고, 전국민의 사기를 진작시킨다는 명분 아래 전후 최초로 전일본 공수도 대회가 개최된다. 공수도 전유파가 참여한 가운데 격파와 대련으로 이루어진 전일본 공수도 대회에서서 우승을 차지하며 무도계에 파란을 예고했다. 그리고 전일본 공수도대회를 통해 상대방 앞에서 가격을 멈춰야 하는 기존 공수도에 다시 한번 염증을 느끼고, 진정한 실전 공수도의 길을 가기 위해 일본 각지에 숨어있는 고수들을 찾아 무도 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는 공수도의 원류라는 교토 니조도장의 니조 십걸을 비롯하여 수많은 고수들을 격파해 나가며 최배달식 실정공수를 알리며 전진하기 시작했다. 최배달에게는 민족주의 성향의 과격파들로부터 엄청난 협박이 날아들었다. 패전 후 겨우겨우 자존심을 세워나가던 일본인들에게 최배달이라는 조선인의 존재는 눈엣가시 같이 일본의 자존심을 짓밟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매일밤 숙소에 돌이 날아들었고, 습격에 대비해 하루에도 몇 번씩 숙소를 옮겨야만 했다. 최배달은 온통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폭풍 같은 대결들을 멈추지 않았다. 고베의 가미소리(면도날)라 불리던 모리, 나고야의 닌자 미와, 검귀 료마를 비롯하여 자신의 공개처형을 선언한 일본내 고수들과의 30:1의 무사시노 혈전, 심지어 싸움소와의 대결까지 그는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증명해 보였다.

세계를 제패한 사나이


무사시노 대혈전을 통해 일본 무도계를 평정한 최배달에게 더 이상의 적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무도의 본질에 대한 의문과 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한 종류의 무도에의 호기심은 그의 눈을 세계로 돌리게 만들었다. 무도 여행은 일본뿐만 아니라 아시아, 유럽, 미국으로 이어졌고 그의 불패의 기록들은 불패의 무신으로 신화의 사나이로 그의 이야기를 다룬 만화와 책이 쏟아져 나왔으며 일본 청소년이 선정한 [위대한 인물 10걸] 중에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선정되었다.

1961년 극진회를 창립한 최배달은 1959년과 1962년에 시카고, 뉴욕, 캘리포니아 등지에 분관을 설립, 30개의 기왓장을 격파하는 등 격파술 시범이 전파를 타면서 미국 대중의 지대한 관심을 끌어낸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집필 활동에 전념하기 시작해 ‘가라데 바이블’ 등의 저서를 남겼으며, 1994년 폐암으로 생을 마감했다.

대산 배달

그러나 그는 유독 조국인 한국에서는 잊혀진 이름이었다. 숀 코너리에게 무술고문을 하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으며 방한 했을 때에도 조국은 그를 일본에서 활동하는 태권도의 고수로 소개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조국은 평생 그리움이었다고 한다. 재일 동포 아주머니를 찾아 눈물을 흘리고 극진 공수도의 정착을 위해 귀화를 하면서도 자신의 이름을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대산 배달’이라는 뜻의 오야마 마쓰다츠로 개명했고 끝내 한국 국적을 소멸시키지 않았다.

방학기의 만화 <바람의 파이터>(1989.8.11~1993.7.20 스포츠 조선 연재)를 통해 국내에 알려지기 시작한 지상 최강의 승부사 최배달. 그는 자신의 집을 방문한 제자들에게 손수 차를 끓여줄 만큼 자상한 사람이었고 항상 “밥은 먹고 다니냐”라는 얘기로 인사를 대신했다. 꽃 모양 뒤에 사자의 모양을 그려 넣은 싸인을 가지고 있던 그는 생전 강함과 약함 아름답고 용맹한 것은 같은 것이라 얘기했고 만화를 그린 방학기의 부인에게는 속옷을 선물할 만큼 섬세한 사람이었다.

타고난 능력보다는 스스로의 의지의 중요함과 남자답게 큰 배포를 가질 것을 권유했던 스승의 가르침을 회상하는 현 극진 공수도 총재 마쓰이(문장규)관장은 영화 <바람의 파이터>가 강해지는 것 보다 강해진 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영화가 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인터뷰에서 피력했다. <바람의 파이터> 양윤호 감독은 강하기 전에 약한 최배달이 있었고 약해서 부서지지 않기 위해 온 인생을 내던져 자신을 단련시켜 나간 최배달이 있었기에 영화화가 가능했다고 고백했다. 아마도 우리는 <바람의 파이터>를 통해 전설의 파이터이기 전 인간 최배달의 모습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자료제공: 아이비전 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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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소포타미아의 각지에서 발견되는 고대의 건조물을 가르킵니다. 지구라트란 높은 곳을 뜻하는 말입니다. 하늘에 있는 신(神)들과 지상을 연결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성탑 또는 단탑이라고도 합니다. 수메르 시대 초기에 신전의 기단에서 발달하였는데, 그 전형적인 형식은 점점 작아지는 사각형 의 테라스를 겹쳐 기단으로 하고 그 최상부에 직 사각형 신전을 안치하였습니다. 벽돌을 쌓아 평면이 사각형 또는 직사각형의 단을 3~5장 겹치고, 최상단에서 다시 계단으로 오르 는 사당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원래는 각 도시에 있었으나, 거의가 무너져 버려서 원형을 간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날까지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것은 우르의 지구라트인데, 밑변이 62.5×43m 입니다. 우르 제 1왕조의것을 우르 제 3왕조의 우르남과 슈르기가 수복한 것입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바벨탑은 바빌론의 지구라트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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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아이폰의 장단점

Story 2007. 8. 26. 19:27


일단 아이폰이 겉으로 보기에 특별한 장점이 없는데 이슈화 되고 있는것은

물론 아이팟을 만든 애플에서 처음으로 출시한 핸드폰이기 때문이죠

만약 아이폰이 아이팟처럼 하나의 문화 아이콘으로 자리 잡을 수 있냐 없냐에

모든 초점이 맞춰져 있는 거죠..

아이폰은 위에서 말했다시피 겉으로 보기엔 일반적인 핸드폰보다 앞서는 것이

없어 보일 수 도 있습니다..

전면 터치 스크린이 눈에 띄는 특징인데 일반적인 터치 스크린 써보신분은 심하게

욕하시죠 프라다 폰만 해도 전면 터치스크린이지만 극악의 조작감을 지녔기에..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아이폰이 관심을 받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하드웨어는 같은 터치 스크린이지만 그 하드웨어를 조작하는 소프트웨어가

천지 차이나는거죠... 프라다폰 같은 경우는 그냥 터치 스크린을 누르면

그 키가 입력되는 방식이지만 아이폰 그러한 터치스크린의 오동작에 대비한

많은 소프트웨어 기술이 담겨있습니다..

예를 들면 영어로 단어를 입력하다가 오타가 나면 아이폰은 우리가 워드프로세서에서

쓰는 것처럼 올바른 단어를 알려주고 수정해줍니다.

또한 time 이란 단어를 쓰기 위해 tim 까지 입력햇다면 아이폰은 스스로 time을 예상하고

e버튼이 눌려지는 범위를 넓히는거죠..

이처럼 멀티 터치 스크린의 효용성을 극대화하면서 오동작을 극소화 하는 기술들이 들어있기에

아이폰이 대단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거죠 프라다폰의 터치 스크린과는 다르게..

물론 단점도 여러가지 지적되고 있습니다만 소프트웨어.. 즉 다른 폰과 엄청나게 차이가 나는

유저 인터페이스에 그러한 단점은 커버가 되는듯 합니다..

또한 휴대폰을 가로로 돌리면 자동으로 화면이 돌아가고,, 휴대폰을 귀에 가져가면

자동으로 화면이 꺼지는 등 기존의 휴대폰에서 찾아 볼 수 없었던 재미있는 기능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전세계 애플 매니아들이 쏟아낼 재미있는 프로그램들이 아이폰에서 구동된다면

정말 최고의 폰의 자리에 오를 수 도 있다 생각하구요..

마지막으로 애플에서 만드는 제품은 전자기기 이상의 의미를 사용자들에게 심어주기로 유명하다

고 하네요.. 제품을 사랑하게 만드는 애플의 재주가 아이폰에도 담겨있을 것이라는 소비자들의

기대심리가 큰 듯합니다.

다만 한국에서는 시스템 문제와 아이튠즈 미진출에 따른 영향으로 출시 가능성이 희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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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삼성의 김남일(30)과 김보민 KBS 아나운서(29)가 평생의 동반자가 됐다.

김남일,김보민 이 두 사람은 12월 8일 오전 11시 서울 한남동 그랜드하얏트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3년의 열애 끝에 맺은 결실이다.

김보민 아나운서의 한 측근은 “두 사람이 결혼식 준비를 거의 끝냈다. 주례가 확정되지 않은 정도다. 김보민 아나운서가 여름 동안 요리를 배우는 등 신부 수업을 받고, 신혼 집을 꾸며왔다. 두 사람이 결혼 날짜를 잡고 행복해 하고 있다”고 밝혔다.

결혼 날짜가 12월 8일로 확정된 이유는 김남일 선수의 스케줄 때문이다. 김남일 선수의 프로축구 K리그의 모든 일정은 12월 2일 끝난다. 김보민 아나운서의 측근은 “사실 내년 1월 설은 터무니 없었다. 전부터 12월 초였다. 김남일 선수의 스케줄과 호텔의 예약 상황 때문에 정확한 날짜를 확정하지 못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올 6월 5일 극비 약혼식을 진행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김남일,김보민 두 사람은 그 동안 변함 없는 사랑을 보여주었다. 김 아나운서는 이 달 19일 서울 전을 통해 약 두 달 만에 그라운드에 복귀한 김남일을 응원하기 위해 수원 월드컵경기장을 찾아 눈길을 끌었다.

김 아나운서의 측근은 “김 아나운서가 스포츠헤르니아 부상으로 지난 6월 일본으로 건너가 수술을 받은 약혼자의 재활에 큰 힘을 주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9월 초 그랜드하얏트호텔에서 공식 기자회견을 진행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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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드센스 가입절차

Story 2007. 8. 25. 12:42


애드센스 가입 절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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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의 나라 인도

Story 2007. 8. 25. 12:20


베다 수학은 간단한 규칙과 원리에 입각한 독특한 계산 체계이다. 산수, 대수, 기하, 삼각법 등의 분야에서 모두 사용할 수 있다고 하는데, 고대의 베다 텍스트에 바탕을 둔 베다어로 되어 있는 계산 체계이다. 오랜 세월에 걸쳐 잊혀져 있다가 비교적 최근에 들어와서야 주목을 받고 있는데, 고대 베다 텍스트의 분석을 통해 그 계산 체계를 재구성하는데 성공한 바라티 크리슈나 티르타지Bharati Krishna Tirthaji 덕분이다. 그는 1960년대에 그것을 영국에 소개했고, 당시 그가 소개한 계산 체계는 일종의 대안 수학 체계로 주목을 받았다. 오늘날에는 일부 학교에서 그 계산 체계를 가르치기도 하며, MBA 과정이나 대학의 경제학과에서 가르치는 경우도 있다.

이미 언급했듯이, 그 체계는 인도의 수트라, 그러니까 고대 경전 문구에 바탕을 두고 있다. 본래 산스크리트로 작성된 한 행 16개의 경구가 그 핵심인데, 기억하기 쉽게 되어 있다. 그 경구를 완전히 기억하기만 하면, 어떤 문제라도 쉽게 풀 수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35평방미터의 면적을 계산한다고 해보자. 그럴 경우에는 에크다히케나 푸르베나 수트라를 사용하는데, 그 문자적 의미는 '앞의 것에 하나를 더함으로써'가 된다. 35의 첫 번째 숫자가 3이고 마지막 숫자가 5인데, 먼저 3에 1을 더해 4를 구하고 3과 4를 곱하여 12를 얻는다. 그리고 5에 5를 곱하여 25를 얻는다. 그 다음은? 12와 25라는 숫자를 단순하게 합치면 1225가 된다. 요컨대 35평방미터는 1225가 된다.

그러면 345평방미터는? 앞의 두 숫자 34에 1을 더해 35를 구하고, 34와 35를 곱하면 1190이 나온다. 그리고 마지막 숫자 5를 제곱하면 25가 나온다. 따라서 답은 119025가 된다. 이 방식은 끝자리가 5로 끝나는 모든 숫자에서 사용할 수 있다. 요컨대 답을 구할 수 있는 계산 방식을 간단하게 설명하는 문구를 암기하는 것이 핵심인 셈.

인도의 델리에는 베다 수학 및 인도 문화 유산 연구 국제재단이 설립되어 있는데, 델리 지역을 중심으로 베다 수학의 보급에 앞장서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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